탑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메뉴닫기
서브메뉴

관객동아리 리뷰

home > 게시판 > 관객동아리 리뷰

<로스트 도터> (2021) - 매기 질렌할/ 글. 우란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전주영화제작소 2022-07-27 220
[관객동아리 ‘씨네몽’ 회원 개봉작 리뷰]
<로스트 도터> (2021) - 감독 매기 질렌할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스트 도터>는 매기 질렌할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자 여성이 여성의 삶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여성이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분출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포착하고 이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가진 특수한 상황과 당연하다 여겼던 지침서(가령 모성애라든지, 또 모성애라든지-)를 강제로 품어야 했던, 여성의 심리를 어떠한 생략과 축약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나 페란테 작가가 '잃어버린 사랑'(<로스트 도터>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조건으로 매기 질렌할 감독의 연출을 요구한 건, 이러한 원작의, 나아가 영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해 보여주는 것보다 여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할 필요 없이 쭉 늘여놓는 것이 감정적 동요와 이해를 더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주는 매력보다, 방법이 갖는 의미를 음미하는 게 <로스트 도터>를 보는 첫 번째 각도다. 

 고요한 해변에 돌연 보트가 침범한다. 이미 해변을 점령한 대가족의 막무가내식 태도도 눈감아줬는데, 자기 집 앞마당에 차를 끌고 들어오듯, 보트를 밀고 들어오다니. 모처럼 그리스로 휴가를 온 레다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평온한 하루를 모아서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풀고자 했는데, 쉽지 않다. 레다는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생각하며 차분히 휴가를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꾸만 시선이 불청객들 사이로 향한다. 니나와 엘레나,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이 서로에게 꼭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레다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깊게 묻어놨던 기억이 불쑥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니나와 엘레나의 모습과 젊었던 레다와 어린 두 딸(비앙카, 마사)의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겹쳐진다. 엘레나가 니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떼를 쓸 때, 비앙카는 레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엄마의 머리를 때린다. 엘레나가 갑자기 해변에서 사라졌을 땐, 바다에서 마사를 안고 애타게 비앙카를 찾는 (패닉 상태에 빠진) 레다의 모습이 펼쳐진다. 레다는 자꾸만 젊었던 때로 돌아가 두 딸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했는지 떠올린다. 그럴수록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끝까지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고자 한다.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도, 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던 레다는 고집스럽게 휴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니나와 엘레나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공중분해 됐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레다는 잠에 빠져있다가 침대를 점령한 매미에 화들짝 놀라고, 해변에서 자리를 바꿔 달라는 캘리(니나의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욕을 먹는다. 그날 저녁엔 누군가가 던진 솔방울에 등을 크게 다치기도 한다. 관리인의 추파를 불편해하면서도 여자로서의 욕망을 참지 못해 벙찐 유혹을 날리고 도망친다. 사라진 엘레나를 잘 찾아주고는 엘레나의 인형을 훔쳐 와 아이를 돌보듯 인형을 품고 있기도 한다.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가 엄마(니나)와 가족들을 미치게 만드는 걸 보고도 레다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라 말하며 침묵한다. 대체 레다는 왜 이러는 것일까. 휴식을 즐긴다고 해놓고 왜 이리 예민하고 초조해하는 걸까. 나아가 왜 그렇게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못되게 구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로스트 도터>는 이를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레다는 일곱 살 비앙카와 다섯 살 마사를 두고 집을 나갔다.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아봐 주고, 존재 이유를 본능적으로 일깨워 준 남자에게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불륜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즐기고 또 누렸다. 아이들과 통화를 하고 나면 매번 참았던 (속마음을 비집고 나오던) 말들을 쏟아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레다에게 자유로, 해방으로, 망가졌던 나를 다시 원상 복귀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그녀에게 불륜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두 딸을 버린 일은 나를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랑을 위한 일이라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니나는 그때의 레다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영화의 두 번째 각도는 니나와 레다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지점에서 더 눈에 띄고 그리하여 관객이 모성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다.)

 <로스트 도터>는 레다의 과거를 그녀가 스스로 자백하기 전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레다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숙소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등대의 불빛과 바닷바람과 함께 노출한다. 비앙카와 마사를 홀로 키워야 했던 레다가 점차 이성의 끈을 놓을 때마다 현재의 레다에겐 태풍이 불어닥친다. 과거의 정신적 고통이 현재의 신체적 고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지쳐버린 니나의 눈에서 중년의 레다는 그때의 파편들이 비바람과 함께 몰려오는 걸 느낀다. 그녀는 니나를 이해하고 동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혐오한다. 현재의 니나와 과거의 자신을 잇는 걸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답답해하면서도, 그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 레다는 두 딸을 버렸던 자신의 선택을 바닷물에 쉽게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쓰인 이야기를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레다는 몸에 새긴 선택의 결과들을 지울 수 없었다. 솔방울에 맞은 상처를 굳이 치료하지 않은 점이 대표적이다. 레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죄다 자신에게서 출발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성애. <로스트 도터>에서 모성애는 감출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너무 많이, 또 빈번하게 여러 인물과 사건, 장치, 나아가 상징으로 쓰이는데, 전부 사실적이고 날카로워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뎌지기 힘든 화두이기도 하다. 어렵게 임신한 캘리에게 당신도 아이를 낳아보면 알 거라는 마치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는 레다부터 레다 자신과 현재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니나, 레다가 엄마에게 받았던 인형(미나), 엘레나의 인형, 솔방울, 인형 속에 든 지렁이, 끊기지 않은 과일 껍질까지 영화에서 모성애는 다양한 형태로 속을 내보인다. 엘레나가 인형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자식을 향한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엄마의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앙카가 레다에게 과일 껍질로 뱀을 만들어 달라 조르는 행위와도 일치한다.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모성애'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성애를 인간의 본능이라 선뜻 말하기 어렵다.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인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영화가 품은 모성애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건, 현실 속 모성애도 같은 껍데기와 내용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이고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인간의 습성 중 모성애는 무엇일까.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이나 규칙들의 합인가? 처음부터 생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인가? 모성은 여성에게 어떤 자기 확신과 자기만족을 주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다의 말처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알 수 없지만,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알아도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레다에게 모성은 자기 발목을 잡는 사랑이 되었을까.
 ​
 모성과 '나'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레다가 끝내 어린 두 딸을 두고 집을 나간 건, '나는 늘 나인가'란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스트 도터>가 지속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레다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 또한 물음에 대한 일종의 해석본(세 번째 각도)이다. 복잡 미묘한 니나의 표정과 모성에 확신하는 캘리의 태도까지 여성에게 모성은 '나'를 만드는 하나의 요소다. 또한 모성은 일방적인 표현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서로에게서 주고받는 표현으로 작동된다. 정석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란 건 분명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모성이 여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가를 조명한다. 모든 엄마가 모성을 똑같은 각도와 동일한 태도로 인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모성을 뒤틀거나 자신만의 모양을 찾는다. 그리하여 모성은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경험했다고 해도 오롯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없다.

 따라서 "절 나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하면서 "지나가긴 해요?"라 묻는 니나의 말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 상반된 시각을 제시한다. 레다가 자신을 이기적인 엄마라고 소개하고, 니나에게 훔친 인형을 돌려주며 "난 비뚤어진 엄마니까요"라며 자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레다는 니나를 함부로 나쁘게 판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조차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엄마라 말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식을 끔찍한 부담이라 말하던 레다는, 본인의 판단으로 선을 넘었고, 그 결과 허울뿐인 자유를 얻었다.
 여성에게 모성이 들어오는 순간, 엄마란 존재가 불쑥 튀어나와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도, 좋지 않은 징조도 아닌 자식을 낳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고, 이미 엄마의 자식이었을 내가 느끼는 불변의 것이다. 레다는 엄마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했다. 그녀에게 엄마는 엄마의 의무를 저버린 여성이었다. 따라서 두 딸에게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겠다 다짐했고, 잠시 동안 그녀는 '나'를 제외하고 '엄마'가 됐다. 엄마가 '나'를 이루는 수많은 자아 중 하나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현실에 치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검열했고, 그 힘마저 빠져나가자 질식할 것 같다며, 엄마이길 포기했다. 엄마로 일할 능력이 되지 않아 그만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엄마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인 듯이.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애는 다양하다. 레다는 모성을 한때 악으로 설정했다. 다른 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모성은 그럴 수 없는 범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니나는 레다의 모성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범죄이자 태만이었다. 딸의 인형을 일부러 훔쳤다는 레다를 보며, 순간 니나는 그녀에게 이해받기를 거부한다. 왜? 니나의 모성은 다른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니나의 모성은 켈리가 가진 모성과 같은가. 아니다. 그들의 모성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없다. 각자의 모성이 남기는 진득한 진액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각도를 세우고 끝을 달리던 영화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모성으로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만큼 모성을 이해할 존재는 없다. (남성들의 역할이 크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가 풍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여성에게 놓인 현실과 그들의 입장, 그리고 그들이 분출하는 감정에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임을 지고 나서는 또 어떤가. 잊을 수 있는가? 잊을 수 있었다면, 레다는 해변에서 니나와 엘레나를 보고도 인자한 미소를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니나가 들고 있던 긴 핀에 찔릴 일도 없었겠지. 그리스를 떠나지 못하고 해변 자갈밭에 쓰러지는 레다의 뒷모습. 관객은 레다가 흘리는 피를 보며 그녀가 선택한 모성애의 결말을 봤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다는 그런 상흔을 갖고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두 딸의 엄마로 살았고, 앞으로도 살 예정이다. 레다는 스스로 긴 형벌을 준 셈이다. 

마치 끊어지지 않게 깎은 과일 껍질처럼.


- 관객동아리 씨네몽, 우란
..이 게시물을 블로그/카페로 소스 퍼가기 twitter로 보내기 facebook으로 보내기
이전글 <아이를 위한 아이> (2021) - 이승환/ 글. 미티 2022-08-05
다음글 <썸머 필름을 타고!> (2020) - 마츠모토 소우시/ 글. 톰 2022-07-23



△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