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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2019) - 하시모토 나오키/ 글. 김진실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전주영화제작소 2022-02-24 285
[관객동아리 ‘씨네몽’ 회원 개봉작 리뷰]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2019) - 감독 하시모토 나오키


애도를 위한 애도,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다분히 감정적이다. 관객에게 집요하게 잊고 있던 이별을 떠올리게 하고 상실에 허우적대던 과거를 다시 경험하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왔던 슬픔과 아픔을 꺼내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원했던 것처럼 묻게 한다. 이미 알고 있지만, 어렴풋이 다들 짐작하고 그러려니 하던 '역'의 존재를 아이와 같은 입장에서 되묻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대체 그 역은 어디 있는 걸까? 또 어디로 가는 걸까?"
여기서 우린 사야카가 말하는 '역'의 존재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가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절대 갈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는 장소, 산 사람들은 결코 밟을 수 없는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야카의 옆에 서서 묻는 거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그럴 수 없는 아이러니함,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명제 때문이다. 그를 영영 잊어버릴까 봐 절절한 그리움과 괴로움조차 함부로 놓을 수 없는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우린 그 행위와 시선, 모든 마음의 조각들을 엮어 시간의 길을 만들고 이를 '애도'라 부른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장면 곳곳에 감정의 활력을 불어넣지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사실 언어(음성)가 제거된 무성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대사보다 인물의 행동으로 사건을 강렬하게 그리는 방식이 이 작품만의 남다른 표현 방식이다. 감독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음성언어보단 인물들의 손짓과 눈빛으로 차근차근 전개하면서, 상실과 그리움을 화면 가득 채워 넣는다. 섬세한 몸의 언어와 절제되어있지만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 방식으로 관객의 공감과 감동 포인트를 쉽게 점령한다. 이 지점엔 반드시 영화의 스토리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명확하게 이해했다는 전제조건이 필수인데, 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철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사야카가 전철이 지나간 뒤 철로에 난 길을 건너는 장면까지 단 3분.

 이 짧은 장면엔 길을 걷는 내내 허공에 팔을 뻗은 사야카의 모습이 전부다. 그러나 우린 아이를 통해 영화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눈치챈다. 아이는 아직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며, 이별로 인해 극심한 슬픔을 겪고 있다. 결국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누군가를 잃은 이별'을 겪어내는, 인물의 애도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루는 사야카에게 언제나 멋진 선물을 해준 존재다. 자신과 같은 외로움을 가진 반려견이었고, 하나뿐인 친구였으며 늘 곁에 있는 가족이었다. 말 그대로 루는 사야카에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사야카는 단호하게 말한다. "루는 절대 죽지 않았어!"라고. 심장병으로 죽은 반려견을 잊지 못해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는 사야카의 현재는, 루와 함께 했던 과거의 추억과 끊임없이 교차된다. 계속 반복되는 과거 회상으로 우린 루가 사야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점점 더 사야카가 느끼는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사야카는 다시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미 부모에게 강아지가 최대 1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준비된 이별과 그렇지 못한 이별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이는 행위의 준비가 아니라 남들은 결코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마음의 준비. 사야카는 루가 자신이 체험학습을 갔을 때 갑작스럽게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의 죽음은 사야카에겐 정말 먼 미래였으니까. 결국 환경적, 시간적 요인에 의한 죽음이란 불길하지만 예정된 조짐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아이는 결코 루를 떠나보낼 마음이 없다.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자연재해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 사야카에게 애도란 그저 '어른들의 거짓말', '부정' 그 자체였다. 

 오래 살면 살수록 인간은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지고 무뎌진다는 말을 나무라듯,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어린아이의 상실과 노인의 상실을 구분 짓지 않는다. 후세는 오래전 사야카 또래, 어린 아들(고이치로)을 사고로 잃었고, 사야카의 할아버지는 아내를 떠나보냈다. 두 사람 모두 사야카와 같은 준비된 이별이 아니었다. 사야카는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고통이 후세와 할아버지가 느끼는 고통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들 역시 강하게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돌연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갑자기 돌변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슬픔과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야카는 그들을 보며 조금씩 자신을 둘러싼 상실을 풀어낸다.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후세에게 루와 함께 한 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추억하고, 반대로 자연스럽게 후세에게 그의 죽은 아들에 대해 듣는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박꽃을 심었던 때를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조용히 그의 손등에 손을 포개며 그를 위로하고, 또 할아버지에게 위로받는다. 

 서글프기만 했던 어린아이가 위로받고, 반대로 타인을 위로하는 장면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고통을 이겨내는 가슴 벅찬 장면으로 연결된다. 영화는 이 따뜻하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한 스푼의 환상과 버무리며 이야기의 몰입감을 높이고, 주제를 더 빛나게 한다. 길고 은은하게 퍼지던 루를 향한 사야카의 진심은, 고이치로와 캐치볼을 하는 후세의 기다렸던 웃음으로 인해 묵직한 파동을 만든다. 그리하여, 사야카가 후세를 보며 "무언가 굉장히 소중한 걸 본 것 같았다."라고 말한 대사는 모든 이의 마음에 돌고 돌아 끝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만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애도를 위한 방식으로 '함께'하는 애도를 선택했다. 
사야카는 후세와 함께 루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를 그대로 '공석'으로 둘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한다. 둘은 슬픔과 두려움은 나누고 따뜻한 온기로 마음을 채우며,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밀려가지 않도록 서로를 붙잡는다. 홀로 남겨진다는 불안과 다가올 외로움에 맞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 그리하여 남겨진 자에게 주어진 삶을 씩씩하고 담담히 살아가는 일.. 사야카는 사라지는 것이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다시 미소를 되찾는다. 아이는 기억하기 시작하면서, 영원의 의미를 깨닫는다. 루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 영원을 말이다.  

 애도는 반드시 애도로 작별해야 한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어두웠던 방문을 열고 나와야 한다. 그 방이 자신의 마음속에 늘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언제든 들어가 울고 웃을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후세가 말한 역은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영화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야카가 직접 끊어진 기찻길을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모르는 척 사야카와 루의 비밀 장소를 우리에게 노출했다. 나만의 비밀 장소를 선정하는 건 애도를 향한 첫 번째 걸음이 분명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사야카는 전철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

 작별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덧붙으면, 아름다운 작별이 된다. 
 고맙게도 후세도, 할아버지도, 사야카도 모두 아름다운 작별을 했다

 우린 기억하는 일을 지겨워하지 않기에 늘 자신이 정한 중심을 잃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한 뒤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던 사야카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어른의 목소리로 변한 걸 눈치챈다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아이였던 사야카가 어른이 되어 '나의 중심, 루'를 추억하는 이야기였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과거로 내일을 말하는 법을 잘 아는, 능숙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귀를 쫑긋거리기보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사야카를 바라보길 추천한다.


- 관객동아리 씨네몽, 김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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